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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정수/한국사의 정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

19.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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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 정부

1) 5.16 군사정변(1961)

- 당시 정세를 혼란하다고 파악한 군부는 박정희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공과 경제성장을 내걸며 쿠데타를 정당화하였다. 권력기구로 국가재건최고희의를 설립하고 산하 기관으로 중앙정보부를 설치했다.

2) 개헌(1962)

- 군부 쿠데타 세력은 대통령중심제로 개헌을 하였다. 민정 이양을 약속했던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양복을 입으면서 공화당을 만들고 대선 후보로 출마한다.

3) 대선(1963)

- 박정희와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로 맞붙었고 근소한 차이로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4) 한일협정(1964)

- 박정희 정부는 선건설 후통일론을 내세운다. 경제발전을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한다. 당시 한국은 자금이 없었기에 외국으로부터 돈을 끌어 오기 위해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을 추진한다. 미국은 미국-한국-일본으로 이어지는 방어체제를 구축하여, 자신들이 아시아에 부담하는 군비를 축소하고 싶어했다. 일본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싶었고 한국은 돈이 필요했다. 1962년 한국대표 김종필과 일본대표 오히라가 비밀회의를 한다. 1964년 한일협정 타결은 이때의 메모와 거의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메모에는 자금 명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독립축하금으로 해석하고 한국에서는 청구권 자금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한일협정 전에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여 6.3시위(1964)이 일어났었다.

5) 베트남 파병

- 미국의 요청을 수용하여 브라운각서를 체결한다. 미국은 한국에 경제 원조 자금, 군 장비 현대화등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국 기업이 대거 베트남으로 진출하는 등 한국은 전쟁특수(베트남 특수)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고엽제 피해, 라이따이한(베트남 내 한인 혼열아) 등의 문제를 유발했다.

6) 대선(1967)

- 놀라운 경제발전으로 인해 박정희가 윤보선을 누르고 두 번째 당선이 된다.

7) 개헌(1969)

- 삼선개헌.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였다.

8) 대선(1971)

- 마지막 출마에서 박정희는 김대중과 맞붙는다. 접전 끝에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9) 유신헌법

- 국제 정세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닉슨독트린 선언 이후 냉전이 완화되며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권의 관계가 완화되었다. 더 이상 반공이 먹히지 않았고 통일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고 있었다. 남과 북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였다. 박정희는 통일을 위한 정부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며 개헌을 하였고, 이것이 유신헌법이다.

- 대통령 임기 6, 대통령 횟수 제한 없음, 국회에서 간선제를 통해 대통령 선출, 국회의원의 1/3은 대통령이 임명, 긴급조치, 국회해산권 등이 유신 헌법의 특징이다. 간선제를 실시하는 국회 모임을 통일주체국민회의라고 불렀다.

- 중앙정보부가 일본에서 유신 반대 운동을 벌이던 김대중을 납치한 사건(1973)을 계기로 유신 반대 운동이 활발해졌다. 유신 정권은 반유신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있으며 배후에 인민혁명당 세력이 있다고 발표하며 관련자를 사형하였다. 사형 선고 후 24시간 내에 사형 당하여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며 사법 살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를 인민혁명당 사건(1974)이라고 한다. 이후 장준하는 실족사(1975)하였다. 함석헌, 김대중, 윤보선 등의 인사들이 유신 체제와 경제 발전 논리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3.1민주구국 선언을 발표하였다(1976).

10) YH무역사태

- 석유파동으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지자 야당의 지지율이 올라갔다. 경제 불황으로 인해 YH무역이라는 회사에서는 여공들을 임의로 해고했다. 노동탄압에 여공들이 저항했고 나중에는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했다. 정부에서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다가 여공 한 명이 사망하였고 이에 신민당 대표였던 김영삼이 항의하자 박정희는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시켰다. 김영삼의 지지 텃밭이었던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에게 저항하는 시위를 벌였다(부마항쟁).

11) 10.26 사태

-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하였다.

12) 12.12 사태

-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대통령으로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가 당선된다. 신군부는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내려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19805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하면서 개헌 논의를 봉쇄하였다.

13) 5.18 광주 민주화 운동

- 광주에서 신군부의 퇴진과 유신 철폐를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다. 신군부는 특공부대원을 동원해 강제 진압하였다. 시민군도 무장하고 맞섰지만 정부의 강제 진압으로 끝났다. 531일 정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령을 발령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는 사실상의 최고기관으로서 국정전반을 통제하였다. 9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개헌을 추진하여 정부에서 헌법개정안을 마련하였다.

14) 개헌

- 대통령 임기는 7년 단임제, 대통령 선출은 대통령선거인단을 통한 간선제로 변경되었다.

 

2. 전두환 정부

1) 유화책

- 전두환 정부는 민심을 얻고자 유화책을 실시하였다. 12시로 통제되었던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교복 및 두발 자유화를 실시하였으며, 프로야구를 시작했다. 3S정책(Sports, Sex, Screen)은 군사 독재로 인한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시행된 정책이다.

1) 6월 민주항쟁

- 정부에서 계속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자 사람들은 직선제에 대한 요구를 계속했다. 이를 위해 개헌을 위한 1천만명 개헌 서명 운동이 전개되었다.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보는 여론을 분산시키고자 했으나, 고문 과정에서 숨진 서울대 학생 박종철 사건으로 여론의 철퇴를 맞는다. 의혹을 제대로 해소하지도 못한 채 전두환은 간선제 헌법을 지키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시위는 격렬해졌고 610일엔 전 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결국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선언이 발표된다.

2) 대선

- 직선제로 개헌된 이후 대선이 일어난다. 야권 후보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되지 않아 표가 분산되어 여야 교체가 일어나지 못하고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3. 노태우 정부

1) 삼당합당

- 총선에서 야당이 여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하게 되면서 정국 운영이 쉽지 않자 여소야대 정국을 해결하기 위해 삼당합당을 추진한다. 이때 김영삼, 김종필이 합류하면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었다.

 

4. 김영삼 정부

1) 역사바로세우기

- 김영삼 정부는 박정희~노태우로 이어지는 31년간의 군정 이후 처음 들어선 민간정부이기에 문민정부라는 별칭을 가졌다.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워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5. 김대중 정부

1) 여야 정권 교체

- 최초로 선거를 통해 여야 정권이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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