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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갈등하는 美의 화신, 수로부인 - 이승수

  노인은 수로의 미적 욕구를 해결해준다. 이런 면에서 노인은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하다. 해룡은 노인과는 성격이 다른 구애자이다. 그는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여 수로의 몸을 취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으로(윤리적으로) 용납되기 힘들며, 그 사랑이 지속되기도 힘들다. (일방적이고, 강제적이기 때문에) 이때 노인은 여론의 힘(이것이 사회이고 윤리이다)을 움직여 수로를 곤경에서 구해준다. 아니 순정공을 도와준다. ···(중략)··· 이렇게 본다면 이 이야기는 수로라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둔 세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로맨스이고, 확대하면 세상의 남녀관계를 세 유형으로 상징화한 이야기다. 세 관계를 도식화해보면, 순정공과 수로는 관습적 관계, 노인과 수로는 정신적 관계, 해룡과 수로는 본능적 관계가 된다. 세 남자는 모두 불행하면서, 또 행복하다. ㅡ 이승수, 갈등하는 美의 화신, 수로부인 中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요새 유행하는 표현으로, 쉬고 있지만 조금 더 푹 쉬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역설이라면 역설이고 아니라면 아니지만, 바쁘고 지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랑은 어떨까. 욕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충족되기를 원한다. 배가 불러도 아이스크림을 또 먹고 싶은 것처럼, 공감과 배려로 행복했던 하루의 마무리는 따뜻한 포옹이길 원하는 것처럼. 

 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욕구를 완전히 충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슬픈 이야기로 해석되기도 한다. 어차피 충족되지도 못할 거, 부정하며 살아야 할까? 아니다. 그렇다면 다양한 방식으로 욕구를 채우기 위해 때론 비윤리적인 변태적 행동들도 해야할까? 역시 아니다. 이건 어떨까. 머릿속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버리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너가 아니라 그냥 너 자체를 알아가는 것. '이러저러한 이유로 널 사랑해'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면도 있구나'가 되면 어떨까. 마음에 드는 면도 있고 아닌 면도 있겠지만, 그런 면들을 통해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 자체가 사랑이지 않을까. 나는 너를 알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너를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