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어의 정수/현대시의 정수

우리 집 - 주요한 (전문/해석/원문파일)

우리 집.hwp
0.02MB
우리 집.pdf
0.06MB

 

우리 집 동편 담 밑에는 돌창*을 파고

서편 담은 곁집 담벼락으로 대신하였소.

그 담에 붙어 있는 닭이 홰*를 가리운 듯이

비스듬히 뻗어난 살구나무, 첫여름에

막대기로 떨구는 선살구의 신맛이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가지를 꺾어다 꽂았던 포플러가

곧은 줄로 자라나서 네 해에는 제법,

높이 부는 겨울바람에 노래를 칩니다.

* 많으시고 무서운 할아버님 안 계신 틈에

지붕에 오르기와 매흙* 깐 마당 파기도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봄에는 호미 들고 메* 캐러 들에 가며

가을엔 맵다란* 김장무 날로 먹는 맛도

나의 좋아하는 것의 하나이었소.

해마다 추석이면 으레히 햇기장쌀에

밀길구미* 길구어* 노티*를 지지더니

늙으신 할머님 지금은 누구를 위하여 ······.

 

(시집 아름다운 새벽, 1924)

 

 

* 돌창 : 도랑창의 준말. 깨끗하지 못하고 지저분한 도랑.

* : 닭이나 새가 앉도록 닭장이나 새장 속에 가로지른 나무 막대

* : 나이

* 매흙 : 벽의 거죽을 바르는 데 쓰는 고운 흙

* : 메꽃의 뿌리

* 맵다란 : ‘매운의 사투리

* 밀길구미 : ‘밀가루의 사투리

* 길구어 : 찧어

* 노티 : 좁쌀, 찹쌀, 기장 따위의 가루를 쪄서 엿기름에 삭히어 찐 떡.

* 주요한 : 평안남도 평양 출생(1900), 평양 숭독소학교 졸업(1912), 일본 메이지학원 중등부 졸업(1918), 에듀우드학우에 발표(1919), 문학 동인지 창조동인, 중국 상해 호강대학 졸업(1925), 동아일보사 편집국장·논설위원(1929),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전무(1933), 해방 후 문단 활동 중단(1945), 사망(1980)

 

 

해석

우리의 개화기는 반봉건, 반외세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진정한 근대화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내게 하였다. 문학에서는 전통적 문학 양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자연스럽게 전통적 문학 양식과 현대적 문학 양식의 접목을 시도하였다. 이 시는 그런 시도의 결과로 산출된 작품이다.

주요한은 불놀이로 상징되는 근대적 자유시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그 정서의 밑바탕에는 전통에 대한 소중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면서, 급격한 근대화로 인해 사라진 우리 것에 대한 아쉬움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근대화의 현실에 반감을 갖기보다는 변화된 현실을 긍정하고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다. 즐겁게 노티를 만드시던 할머니의 옛 모습을 볼 수 없음은 근대화로 인한 전통적 생활 양식의 붕괴를 의미한다. 급격한 현실 변화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보편적인 심리이다.

이 시는 한 행이 4음보로 낭송된다. 4음보 율격은 3음보 율격과 함께 우리 시가의 대표적 전통 율격이다. 주요한은 근대적 자유시를 추구하면서도 민중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의도로 이 같은 전통 율격을 사용한 작품을 창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학지광1914년에 발행된 학술지이다. 일본 도쿄의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로 최팔용을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하여 창간되었다. 논문, 기행문 수필, , 한시, , 소설, 학우회 기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광수의 희곡 규한(1917.1)과 김우진의 소위 근대극에 대하여(1921.6) 등 한국 근대문학 초기의 다수의 문예 작품들을 싣고 있어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 주요한은 학지광의 필자 중 한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