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뒷산은 청청(靑靑)
풀 잎사귀 푸르고
앞바단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든다.
산새는 죄죄
제 흥(興)을 노래하고
바다엔 흰 돛
옛 길을 찾노란다.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 리 포구(十里浦口) 산 너먼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과 논다.
수로 천 리(水路千里) 먼먼 길
왜 온 줄 아나.
예전 놀던 그대를
못 잊어 왔네.
(『조선시단』 창간호, 1929.11.)
* 김억 : 김희권. 안서. 안서생. AS. 평안북도 정주 출생(1886), 오산중학 입학(1907), 게이오 의숙 영문과 입학(1913), 동경 유학생 기관지인 『학지광』에 「미련」, 「이별」 발표(1914),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 김소월 지도(1916), 『폐허』, 『창조』 동인(1920), 동아일보사 학예부 기자(1924), 6·25 때 납북(1950)
◈ 해석
이 시는 산수와 조화된 한국인 특유의 인정미를 7·5조의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들이 대체로 애틋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띠는 데 반해, 이 시는 경쾌한 3음보 리듬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자연과 화자의 정감이 어우러져 밝고 정겨운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과의 합일과 과거 속으로의 회귀 욕구가 담담한 독백체 어투로 잘 나타나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처럼, 인연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심성 구조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화자는 ‘오다 가다 길에서 / 만난 이’를 못 견디게 그리워한다. ‘자다 깨다 꿈에서’까지 만날 정도로 정든 그 사람이, ‘짙어가는 풀잎’처럼, ‘밀려드는 파도’처럼 그리워 화자는 마침내 ‘십리 포구 산 너머’ 찾아 나선다. 화자는 그와의 인연을 ‘그만 잊고 그대로 / 갈’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청청’, ‘중중’, ‘죄죄’와 같은 음성 상징어와 청백의 대비를 통한 선명한 이미지 제시 방법으로써 밝고 경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치 ‘죄죄 / 제 흥을 노래하’는 ‘산새’처럼, ‘송이송이 / 바람과 노’는 ‘살구꽃’ 향기처럼, ‘십리 포구 산 너머’를 향하는 화자의 발걸음은 하늘을 날아오를 듯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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