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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의 정수/현대시의 정수

봄 - 황석우 (전문/해석/원문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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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가고 결박 풀어져 봄이 오다.

나무, 나무에 바람은 연한 피리 불다.

실강지*에 날 감고 발 감아

꽃밭에 매어 한 바람*, 한 바람씩 당기다.

 

가을 가고 결박 풀어져 봄이 오다

너와 나 단 두 사이에 맘의 그늘에

현음(絃音)* 감는 소리.

새야, 봉오리야, 세우(細雨), 달아.

 

(태서문예신보16, 1919.2.)

 

 

* 실강지 : ‘실패의 사투리. ‘실패는 실을 감아 두는 작은 나무쪽 따위.

* 바람 : 실이나 노끈 따위의 한 발 가량 되는 길이.

* 현음(絃音) : 현악기를 연주할 때 나는 소리.

* 황석우 : 서울 출생(1895),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 폐허동인으로 참여, 폐허애인의 인도(引渡), 벽모의 묘, 태양의 침몰등을 발표하며 등단(1920), 장미촌창간에 관여(1921), 조선시단주재, 중앙일보사 기자 역임, 사망(1960)

* 태서문예신보 : 1918926일 창간된 주간 신문. 장두철의 주재로 타블로이드판 8쪽으로 창간하였다. 창작시, 번역시, 창작 소설, 번안 소설, 시론, 외국 문학, 문단 사정의 소개 등을 실었다. 이 중 창작시와 해외시의 소개를 겸한 시론들이 주목된다. 특히 김억의 , 봄은 간다, 황석우의 , 등은 이전의 창가·신체시의 틀을 벗어나 근대성을 획득하고 있어 의의가 있다. 번역시는 주로 장두철과 김억에 의해 발표되었으며, 백대진과 김억에 의해 다수의 해외 시론이 소개되었다. 번역시들과 해외 시론은 1920년대 초기부터 한국 시단을 풍미한 데카당스와 세기말적 풍조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1921716호로 종간하였다.

 

 

해석

1행은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는 내용이지만, 여기에서는 겨울을 생략한 대신 결박 풀어져라는 감각적 시구를 통해 겨울의 이미지를 명쾌하고 세련되게 제시하고 있다. 2행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모습을 나무다음의 쉼표(,)를 통해 바람이 나무를 피리 삼아 연주하는 장면으로 제시하여, 봄날의 풍경을 보여 준다. 3·4행은 ’, 즉 세월의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 꽃밭에 매인 채 한 바람씩 당겨지듯 흘러가는 세월에서 피리 소리가 느껴질 듯하다. 피리 소리의 청각적 이미지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꽃들의 시각적 이미지가 어우러져 평화로운 세월의 흐름을 잘 보여 준다. 5행은 1행의 반복이지만 다소 의미 차이가 있다. 5행의 결박은 화자와 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마음]의 그늘이 풀어진다는 의미로 쓰였다. 이제 시적 공간은 화자의 내면으로 옮겨온다. 7행에서 결박 풀린 너와 나의 사랑이 아름다운 현음으로 들려온다. 단절되어 있던 자아와 세계는 마침내 일체화를 이룬다. 이는 8행에서 ’, ‘꽃봉오리’, ‘가느다란 비’, ‘을 부르는 행위로 드러난다.

우리나라 상징주의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18년 창간된 태서문예신보를 통해 김억이 ‘Il pleure dans mon coeur’ 4편의 베를렌느 시를 옮겨 게재한 것이 우리나라에서의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의 번역 수용의 효시이다. 김억은 이후 베를렌느 시 번역에 힘을 기울여 21편의 시를 여러 차례 다듬어 번역하였는데, 주로 폐허, 개벽, 조선문단, 가톨릭 청년이 그 매체였고, 오뇌의 무도(1921)라는 한국 최초의 서구 번역시집으로 집대성되었다. 이 시집은 당시 시단에 상징적·퇴폐적 시풍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상징주의는 한국 현대시의 지배적 경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1920년대 중반 이루어진 민요시 운동, 카프의 조직과 함께 이루어진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다가, 차츰 한국 문학의 배경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전면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상실하긴 했지만, 상징주의의 작시관이나 문학관은 이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인 김광균의 시는 랭보의 모음처럼 공감각적 작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서정주의 화사집에서 보여 준 시적 경향은 보들레르의 악마주의적 경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황석우는 1920년 염상섭·오상순·김억·변영로·남궁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신문학 초창기의 대표적 동인지인 폐허를 창간하고 본격적인 작품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폐허창간호에 벽모의 묘를 발표한 이후 주로 상징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띤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상징시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는 1921년 우리나라 신문학 최초의 시동인지 장미촌을 주재하고 낭만주의적인 자유시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우리나라 자유시 초기의 여러 경향을 한 몸에 지닌 상징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시는 벽모의 묘로 대표되는 세기말이나 상징주의적 심각성과 암담함이 의식적으로 추구되기 이전의 초기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사랑을 주제로 하여 밝고 건강한 서정성을 세련된 표현 기법으로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