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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의 정수/현대시의 정수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전문/해석/원문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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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시집 님의 침묵, 1926)

 

 

* 가이없는 : 끝없는.

* 한용운 : 한정옥(韓貞玉). 만해(萬海). 한유천(韓裕天). 충청남도 홍성 출생(1879), 동학에 가담하였으나 운동이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감(1896),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1919),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1927), 월간지 불교발행인(1930), 사망(1944).

 

해석

이 시는 님의 침묵과 함께 만해시 가운데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연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모든 행에서 유사한 통사 구조(‘A는 누구의 B입니까’)가 반복된다. ‘누구님의 침묵과 동일한 존재로, 이 작품은 자연의 신비를 노래했다기보다, ‘에 대한 찬양과 헌신의 의지를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다.

1~5행에서 보여 주고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자연 현상은 모두 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의 발자취는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이고, ‘의 얼굴은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이며, ‘의 입김은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이다. ‘의 노래는 신비의 계곡에서 나와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의 물소리이며, ‘의 시는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인 것이다.

6행에서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를 통해 소멸과 생성의 변증법적 확신이 드러난다. 님의 침묵에서 드러난 거자필반의 철학(‘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이 소멸과 생성의 원리로 제시된 것이다.

등불은 자신을 불태워 남을 밝히는 존재이다. 화자는 절대적인 을 향해 다시 기름이 되는 생성의 믿음과 의지를 굳게 갖고 재가 되는 소멸의 아픔을 기쁨으로 감수하고 있다. 이러한 시상은 불교의 윤회 사상, 연기설, 색즉시공의 철학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대승불교 경전인 반야바라밀다심경에 나오는 말이다. ‘은 형태가 있는 것 또는 대상을 형성하는 물질적인 것이다. ‘은 비어 있는 것으로 실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이다. ‘색즉시공이란 우리는 (대상)’을 어느 특정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실은 그것은 광범한 연계 위에서 그때그때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일 뿐이며 그 테두리를 벗어나면 이미 그것은 대상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이므로 그 대상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공즉시색은 지각되지 않는 어떤 경지에 색(불교적 진리)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