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시집 『님의 침묵』, 1926)
* 한용운 : 한정옥(韓貞玉). 만해(萬海). 한유천(韓裕天). 충청남도 홍성 출생(1879), 동학에 가담하였으나 운동이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감(1896),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1919),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1927), 월간지 『불교』 발행인(1930), 사망(1944).
◈ 해석
화자는 자신을 ‘나룻배’에 비유하고 나룻배와 행인의 관계를 통해 인내와 희생, 사랑에 대한 숭고한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당신’은 나를 흙발로 짓밟지만 화자는 기쁨과 사랑을 느낀다. 흙발로 짓밟히는 순간만이 ‘당신’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당신’과 함께할 때 화자는 기쁨에 넘쳐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간다. 물을 건넌 ‘당신’은 화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간다. 화자는 ‘당신’이 올 때까지 ‘바람’과 ‘눈비’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화자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2연 3행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에 드러난다. 임에 대한 절대적 믿음, 거자필반의 원리를 믿고 있기에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며 낡아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인욕’과 ‘보시’라는 불교적 윤리 의식과도 관련되어 있다. ‘인욕’은 욕된 일에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고 참는 것, ‘보시’는 자기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주고 희생함으로써 탐욕을 이겨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흙발로 짓밟혀도 원망하지 않고(인욕), ‘당신’을 안아 물을 건너며(보시), ‘당신’이 오실 때를 기다리는 헌신적 사랑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만해의 시는 소월의 시와 비교를 해 볼 수 있다. 소월의 ‘임’은 이미 죽었거나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떠나 버렸기에 소월의 시는 비탄과 체념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 반면 만해의 시에서 화자는 ‘임’이 반드시 돌아올 것을 확신하므로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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