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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의 정수/현대시의 정수

나의 침실로 - 이상화 (전문/해석/원문파일) ― 가장 아름다고 오랜 것은 오직 꿈속에만 있어라 : 내말 ―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眞珠)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논개(論介)의 애인(愛人)이 되어서 그의 묘(廟)에 - 한용운 (전문/해석/원문파일)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矗石樓)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回想)한다. 술 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핀*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
명상(冥想) - 한용운 (전문/해석/원문파일) 아득한 명상의 작은 배는 가이없이 출렁거리는 달빛의 물결에 표류(漂流)되어 멀고 먼 별나라를 넘고 또 넘어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이 나라에는 어린 아기의 미소(微笑)와 봄 아침과 바다 소리가 합(合)하여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은 옥새(玉璽)의 귀한 줄도 모르고, 황금을 밟고 다니고, 미인(美人)의 청춘(靑春)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이 나라 사람은 웃음을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좋아합니다. 명상의 배를 이 나라의 궁전(宮殿)에 매었더니 이 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天國)을 꾸미려고 돌아왔습니다. 달빛의 물결은 흰 구슬을 머리에 이고 춤추는 어린 풀의 장단을 맞추어 넘실거립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
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 - 한용운 (전문/해석/원문파일)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작은 새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무치는 백골(白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려고 떨어진 꽃을 줍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주운 꽃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의 능히 떨어진 꽃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 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 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찬송(讚頌) - 한용운 (전문/해석/원문파일)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으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明)과 평화(平和)를 좋아하십니다.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시집 『님의 침묵』, 1926) * 한용운 : 한정옥(韓貞玉). 만해(萬海). 한유천(韓裕天). 충청남도 홍성 출생(1879), 동학에 가담하였으나 운동이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감(..
정천 한해(情天恨海) - 한용운 (전문/해석/원문파일)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쏘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 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만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 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도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느려면 님에게만 ..
복종 - 한용운 (전문/해석/원문파일)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 한용운 : 한정옥(韓貞玉). 만해(萬海). 한유천(韓裕天). 충청남도 홍성 출생(1879), 동학에 가담하였으나 운동이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감(1896),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1919),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1927), 월간지 『불교』 발행인(1930), 사망(1944)..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전문/해석/원문파일) 당신이 가신 후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더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