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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의 정수/고전산문의 정수

삼국유사(三國遺事) - 염촉(厭髑)이 순교하다/이차돈(異次頓)

※ '탈해왕(脫解王)'은 '삼국유사' 제1권에 실려 있다.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고구려로부터 묵호자(墨胡子)*가 신라 일선군(一善郡)에 있는 모례(毛禮)란 사람의 집에 왔다. 이때 중국 양() 나라에서 사신이 향을 가지고 왔는데 신라에서는 그때까지 향이 무엇에 쓰는 것인지를 몰랐다. 그래서 묵호자가 이를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태우면 향기가 피어 올라 신()에게 통할 수가 있는데, 부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합니다.”

  그때 마침 공주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왕은 묵호자에게 향을 피워 낫게 해 보라고 했다. 묵호자가 향을 피우고 기도를 드리자 공주의 병은 깨끗이 나았다. 이때부터 신라에 불교가 조금씩 전래된 것이다.

  불교가 전래되기는 했지만, 당시의 무속(巫俗)과 배치되는 점이 많아 전국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신라의 제23대 왕인 법흥황은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 많은 고심을 했다. 그래서 곳곳에 절을 세우게 했으나 신하들이 즐겨 따르지 않았다.

  법흥왕의 신하 가운데 이차돈이 있었다. 이차돈의 성은 박씨, ()는 염촉(厭髑)으로 아진찬(阿珍飡) 종랑(宗郞)의 손자이다.

  이차돈은 22세 때 사인(舍人)이란 벼슬에 있었는데, 왕이 불교를 일으키려는 것을 보고 자신이 순교(殉敎)할 것을 결심했다. 이차돈은 왕에게 자신을 여러 사람 앞에서 참수(斬首)하여 더이상 불교를 배척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권하였다.

  왕은 처음에는 그럴 수 없다고 하였으나, 마침내 이차돈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왕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이차돈을 꾸짖었다. 절을 지으라는 명을 어긴 죄를 물어 목을 베게 하였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젖처럼 흰 피가 한 길이나 되도록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하늘이 캄캄해지고, 땅이 울리는가 하면, 꽃잎이 비오듯 떨어졌다.

  왕과 신하들은 그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백성들도 이때부터 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이차돈의 시체는 그의 소원대로 북산(北山)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 위치는 지금의 금강산이라 한다.

  이차돈의 순교 후, 신라는 집집마다 불교를 믿게 되어 마침내 국교(國敎)로 삼게 되었다.

 

* 묵호자

인명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한 고구려의 승려(?~?). 신라 눌지왕 때에 고구려로부터 신라 일선군(一善郡:善山)의 모례(毛禮)의 집에 들어와 불교를 널리 전하고 영흥사를 창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