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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의 정수/고전산문의 정수

삼국유사(三國遺事) - 보양이목(寶壤梨木)

※ '보양이목(寶壤梨木)'은 '삼국유사' 제4권에 실려 있다.

 

  신라의 보양(寶壤) 스님이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서해(西海)에 이르자, 용이 나와 맞으면서 불경(佛經)을 청했다.

  보양 스님은 용궁에 들어가 염불을 했다. 그랬더니 용은 금빛 가사(袈裟)* 한 벌을 주고, 또 스님을 모시라고 그의 아들 이목(螭目)*을 딸려 보냈다.

  용은 보양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국 가운데 불법을 믿는 임금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국에 돌아가거든 작갑사(鵲岬寺)를 지어 그곳에서 피난하고 있으면, 수년 내에 불교를 숭봉하는 임금이 나와 삼국을 통일할 것입니다.”

  이목의 안내로 보양 스님이 한 골짜기에 이르자 자칭 원광(圓光)’이라는 스님이 나와 상자 하나를 주고는 사라졌다. 상자 안에는 도장이 들어 있었다.

  보양 스님은 황폐한 절을 수리하기 위해 북쪽 산으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절 뜰에 황금빛 5층 탑이 보였다. 내려와 보니 탑은 간 곳이 없어 다시 산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아까 그 자리에 까치들이 모여 땅을 쪼고 있었다. 그제서야 작갑사를 지으라는 바다 용의 말이 생각났다.

  스님이 까치가 모였던 자리를 팠더니, 옛 절터가 나왔다. 그곳에 절을 세운 보양 스님은 절 이름을 작갑사라 하였다.

  얼마 후 고려 태조(太祖)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웠다. 태조는 보양 스님이 이곳에 절을 지었다는 말을 듣고 땅 5백 결()을 절에 주었으며, 후에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절 이름까지 내렸다.

  한편, 이목은 절 옆에 있는 작은 못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가뭄이 들어 흉년이 들자, 보양 스님은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도록 했다. 이를 본 천제(天帝)는 이목이 마음대로 비를 내렸다 하여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스님은 이목을 책상 밑에다 감추어 주었다.

  얼마 후 천제의 심부름꾼이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 하였다. 스님은 뜰에 있는 배나무[梨木]를 가리키며 그곳에 있다고 속였다. 천제의 심부름꾼은 배나무에 벼락을 치고는 올라가 버렸다. 쓰러진 배나무를 이목이 쓰다듬으니 배나무는 다시 소생하였다.

  또한 청도(淸道) 운문산에 도적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태조가 보양 스님에게 술책을 물어 도적을 완전히 소탕하고는 해마다 그 절에 쌀 50석씩 하사하기도 하였다.

 

* 가사

불교승려가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법의(法衣). 종파에 따라 빛깔과 형식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마납, 무구의, 인욕개, 인욕의, 자비옷, 자비의, 전상의, 전의, 탁의, 해탈당상.

 

* 이목

뿔 없는 용이나 이무기